우연히 발견한 파카 21

30년전이었나 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으로 받은 단 하나의 만년필…
아버지가 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파카51이 유행이었지만, 혼수용품으로 사용될만치 고급펜이었기에 파카51을 닮았으면서도 저렴이 축에 들었던 파카 21입니다.
서울에서 근무할 때 처음 이 펜을 꺼내들었을 때의 느낌은…뭐라고 해야만 할까요.
사실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뒤 처음 유품을 받아들었을 때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학교 공부, 미래에 가질 직업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청소년 시절이었지요.
세월이 지나고 새로운 만년필을 대학교 졸업선물로 받아서 십수년간 사용했으면서도 아버님 유품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갑자기 꺼내들어 본 펜이었지요.
군데군데 잉크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세척이랍시고 물에 감가두어 보았더니만 잉크가 끊임없이 나오는 겁니다.
파카 21의 잉크쌕은 교체형이 아닙니다.
일반인이 쉽게 분리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구요.
당시 펜후드 만년필 카페를 뻔질나게 들락거리던 시절이었군요.
이 때 을지로 만년필연구소에 처음 갔더랬습니다.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찾아간 곳에서 사람좋은 파카 51님을 만날 수가 있었지요.
만년필을 보여드리니, 가볍게 전문가의 손으로 잉크쌕을 분리하고 오래된 쌕도 척척 세척해준뒤 역순으로 조립해서 완성했습니다.
시필해보라고 건네주시는데…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아버님은 강력계 형사이셨습니다.
유품으로 남긴 파카 21 만년필은 함께 남은 형사수첩과 함께 실사용하며 휴대하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필해보니 너무나 부드럽게 나오는 느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잉크흐름이 매우 좋은 것과 굵은 글씨로 쓰여지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아마도 최소한 m닙 이상은 되는것으로 판단합니다.

파카 21 만년필은 파카 51의 인기에 부응하여 내놓은 저렴한 만년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결혼할 당시에는 파카 51을 결혼선물로 가져갈 정도였으며, 파카 51보다는 좀 더 저렴한 파카 21의 인기도 상당했습니다.
파카 21의 캡탑 부분입니다.
파카 51에서 당연히 있어야 하는 쥬얼부가 없습니다.

파카 만년필 특유의 화살촉 클립입니다.
모든 파카펜에는 화살촉 클립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30여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강한 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카펜이라는 것을 캡에 음각으로 새겨놓았군요.

파카 21은 전형적인 후디드닙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잉크마름에 강하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적절한 필기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후디드 닙의 특성상 피더는 최소화한 상태입니다.
닙이 클 경우에는 피더에 가로줄무늬 구조를 넣어서 잉크를 머금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만 파카 21의 경우 닙의 끝만 돌출되는 구조이므로 피더가 클 이유가 없습니다.
닙을 고정해주는 용도로만 설계된 상태입니다.

파카 21과 파카 51은 두 제품을 똑같이 놓고 보지 않는 이상 펜 하나만 놓고 보면 도저히 구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파카 21의 경우 그립부 재질을 저렴한 것으로 제작하다보니 열화현상이 발생되곤 합니다.
아버님의 파카 21 역시 그립부가 오랜 사용으로 인하여 살짝 변형되어 있습니다.
사진상에서는 확연히 볼 수는 없지만, 그립부를 잡았을 때 변형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쌕 부분입니다.
파카 21까지는 이렇게 4-time filler 라는 잉크쌕을 사용했습니다.
닙을 잉크에 담근 뒤 잉크쌕을 몇번 눌렀다 놓으면 잉크가 충전되는 방식입니다.
워낙 오래되다보니 충전되어 있던 잉크가 만년필 전체에 눌러붙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파카 21의 그립부와 잉크쌕 부분, 배럴, 캡을 분리한 상태입니다.
잉크쌕은 세척을 요할 경우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파카 21은 파카 51의 형제인 셈입니다.
모양도, 형태도 매우 유사하게 제작되었으며 저렴하게 판매가 되었습니다.

수리와 세척이 완료된 파카 21입니다.
30여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필기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당시 파카 51님께 어떻게 사용해야 오래오래 사용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만년필이란 간수해 둔다고 오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사용해 주어야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잉크를 듬뿍 먹여주어 보았습니다.
이제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그 나이보다도 훨씬 더 나이가 들어버렸군요.
유품만 남아 제게 아버님을 추억해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만년필을 방출하는 일은 제 생전에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당연하지만 아이에게 물려주려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유품으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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